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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일(서일대학 민족문화과 교수)
변안열(邊安烈; 1334-1390)은 고려말의 무신으로 자는 충가(忠可), 호는 대은(大隱), 본관은 원주이며 아버지는
증판삼사사 양(諒)이다.
1268년(고려 원종 9년) 원의 사신 탈타아(脫朶兒)를 수행하여 원나라에 갔던 변순(邊順; 변안열의 조부)이 원 세조를
알현하고 심양에 머물다가 심양후의 봉작을 받았고 나중에 고려에서 찬성사(贊成事)를 추증받았다. 또한, 변안열의
부친 변량(邊諒) 역시 심양후를 승계하고 고려국으로부터는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추증되었다.
심양에서 출생한 변안열은 1351년 원나라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올랐다. 1352년 겨울 노국공주
(魯國公主;원나라 위종의 딸)가 고려의 강릉대군(공민왕)에게 출가하게 되자 변안열은 배종수장의 임무를 띠고
환국하였다. 1352년 강릉대군이 즉위하니 그가 곧 공민왕이다.
공민왕은 변안렬을 그의 외사촌 판추밀사 원의의 딸과 결혼시키고 原州(원주)를 관향으로 내려주었다. 1352년(공민왕
1년) 변안열이 열아홉 살 때로, 이로써 변안열은 원주 변씨의 시조가 되었다.
변안열은 1361년(공민왕 10년) 안우(安祐)와 함께 홍건적을 물리치고 2등 공신으로 판소부감사(判少府監事) 직을
받았다
. 개경이 수복되자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제수받고 삼사밀직사(三司密直事)에 올랐다. 1374년 8월 왜구들이 제주도에
쳐들어오자, 최영과 더불어 탐라(제주)를 정벌하고 판추밀직지문하사를 거쳐 문하평리사를 역임하였다.
1376년(우왕 2년) 부여에까지 침입한 왜구를 대파하여 문하찬성사에 올랐다.
1380년(우왕 6년)에는 강성한 힘으로 내륙지방인 충남 서천과 전라도 남원 구례까지 밀고들어온 왜구를 변안열은
이성계의 부장으로 참여하여 대파하였다. 그 유명한 황산대첩(荒山大捷)이다.
그해 9월 운봉(雲峰) 월인역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치고 변안렬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개선하자 임금은 문하시중
최영으로 하여금 천수문(天壽門)을 설치하게 하고 백관들을 도열시켜 장군을 맞도록 했다. 그때 이성계와 함께
금 50냥을 상으로 받았으나 두사람 모두 사양하고 받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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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안열 묘표 뒷면. 삼족오 문양ⓡ 임병규?양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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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정방제조(政房提調)가 되어 그 세력이 임견미(林堅味)?이인임(李仁任) 등과 겨루게 되었다. 1382년(우왕 8년) 단양, 안동으로 쳐들어온 왜구를 격퇴시켜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에 봉해지고 판삼사사(判三司事), 뒤에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고려의 사직이 위태롭게 되자 변안열은 우왕(禑王)과
제휴하여 이성계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1389년(공양왕 원년) 10월 11일, 이성계의 생일날 사병 2만을 거느리고 있는 변안열을 마음대로 했다가 무슨 변을 당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차에 이성계는 자신의 생일날 주안상을 마련해 놓고 정몽주와 변안열을 사랑채로 초대하였다.
이 자리에는 물론 이방원도 함께 배석하였다. 술잔이 몇 순배 돌자 이방원은 정몽주와 변안열을 떠보기 위해
시 한수를 읊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그 유명한 「하여가(何如歌)」를 읊자,
이에 대해 정몽주는 「단심가(丹心歌)」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로 답하고
변안열도 「불굴가(不屈歌)」
“가슴팍 구멍 뚫어 동아줄로 무주 꿰어,
앞뒤로 끌고 당겨 감켜지고 쏠릴망정,
임 향한 그 굳은 뜻을 내 뉘라고 굽히랴.“(김천택, 『청구영언』<언락>에서)
라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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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안열 묘표 앞면. 토끼가 방아찧는 문양
ⓡ 임병규?양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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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굴가(不屈歌)」를 통해 변안열은 고려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어떤 힘에도 굽힐 수 없음을 밝혔다. 이 불굴가는
무신의 곧은 절개가 절절히 담겨있는 충절가라 할 수 있다.
이후 변안열은 1389년(창왕 1년) 대호군 김저(金佇) 등이
이성계의 제지와 우왕의 복위를 모의한 일에 연루되어 이림(李琳)?
우현보(禹玄寶)?이색(李穡) 등과 같이 한양에 유배되었다가
처형되었지만 고려의 충신으로 널리 칭송받고 있다.
그러나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는 자신에게 반대하였던 변안열을
복권하였고 그의 세아들까지도 관직을 주어 우대하였다.
현재 변안열의 묘역은 진건읍 용정리 701-1번지에 잘 정돈되어
있고 특히 묘표의 관석(冠石) 부분 문양이 특이하다. 변안열 묘표의
관석을 보면 앞면에 토끼가 방아를 찧는 문양이 있고 뒷면에 새(三足烏로 추정)가 두렷이 양각되어 있다.
삼족오(三足烏)는 태양을, 토기는 달을 상징하는 문양이다. 그런데 이곳에 조각된 문양들은 고대의
일월신앙(日月信仰)보다는 풍수음양사상과 연관지어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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